빌헬름 쿠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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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빌헬름 쿠노는 독일의 정치가이자 기업인으로, 1922년부터 1923년까지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법학을 전공하고 재무부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식량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이후 함부르크 아메리카 라인(HAPAG)의 회장을 역임하며 경제 전문가로 활동했으며, 1922년 총리에 임명되어 루르 점령에 대한 소극적 저항 정책을 추진했으나, 인플레이션 심화로 인해 사임했다. 총리 퇴임 후에는 HAPAG 대표 이사로 복귀하여 해운업에 종사했으며, 1932년에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경제 자문을 했지만, 히틀러의 총리 지명에는 반대했다. 193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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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쿠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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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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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빌헬름 카를 요제프 쿠노 |
존칭 접미사 | 제3회 도미니코회 |
출생 | 1876년 7월 2일 |
출생지 | 줄, 독일 제국 |
사망 | 1933년 1월 3일 (56세) |
사망지 | 아우뮐레, 바이마르 공화국 |
배우자 | 마르타 베르타 비르츠 |
자녀 | 5명 |
소속 정당 | 없음 |
정치 경력 | |
직위 | 독일 총리 (바이마르 공화국) |
임기 시작 | 1922년 11월 22일 |
임기 종료 | 1923년 8월 12일 |
이전 | 요제프 비르트 |
이후 |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
대통령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
2. 생애와 경력
줄 출신으로, 파더보른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베를린 대학교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법학을 배웠다. 재학 중 여러 가톨릭계 학생 단체에 가입했으며, 1900년 브레슬라우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06년 함부르크 실업가의 딸과 결혼하고, 지방 재판소 근무를 거쳐 1907년 독일 재무부에 들어가 과세액 사정관, 정부 입법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에는 곡물관리부와 식량부에서 일했으며, 다시 재무부로 복귀해 전시 경제 담당 총 고문관으로 일했다. 1917년 관리를 그만두고 함부르크 아메리카 라인(HAPAG)에 입사하였다.
1918년 독일 혁명에 절망한 알베르트 발린이 자살한 후, 함부르크 아메리카 라인 회장이 되었으며, 경제 전문가이자 비공식 대변인으로서 패전국 독일과 연합국 간의 교섭에 관여했으나, 바이마르 정부의 재무장관이나 외무장관 취임 요청은 계속 거절하였다.
1922년 11월 요제프 비르트 내각이 물러나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중앙당, 독일 인민당, 바이에른 인민당이 연립한 소수 여당의 경제 내각을 조성하였다. 쿠노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국회의 승인을 받지 않고 대통령 권한으로 총리 직에 오른 첫 총리였다. 내각의 다수 각료는 경제계에서 초빙돼, 전쟁 배상금 문제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미국과 좋은 관계를 이끌어낼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총리 직에 오른 직후인 1923년 1월, 밀린 배상금 지불을 목적으로 한 프랑스군과 벨기에군에 의한 루르 점령이 일어났을 때, 소극적인 저항 정책을 주장하였고, 이후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사회민주당이 불신임 가결안을 가결하자 1923년 8월 총리 직에서 물러났다.
1926년 함부르크 아메리카 라인(HAPAG) 대표 이사에 복귀하였다. 1932년 독일 재계의 나치당 경제 자문 기관에 참여했으나, 아돌프 히틀러의 수상 지명에는 반대했으며, 1933년 1월 심장 발작으로 함부르크 교외의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2. 1. 초기 생애
1876년 7월 2일, 당시 프로이센 왕국 작센주의 줄 (현 튀링겐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우구스트 게오르기 빌헬름 쿠노와 어머니 카타리나 엘리자베트 테레지아 사이에서 태어났다.[7] 파더보른의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베를린 대학교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재학 중 여러 가톨릭 계열 학생 단체에 가입했다. 1900년 브레슬라우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06년 함부르크의 실업가 딸 마르타 베르타 빌츠와 결혼하여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7]2. 2. 공직 생활과 제1차 세계 대전
1906년 함부르크 실업가의 딸과 결혼 후, 지방 재판소에서 근무하다 1907년 독일 제국 재무부에 들어가 과세액 사정관 및 정부 입법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초기에는 Regierungsassessorde(정부 평가관)이었다가,[1] 1910년에는 Regierungsratde(정부 참사관)으로 승진했고,[1] 1912년에는 Geheimer Regierungsratde(비밀 정부 참사관)으로 승진했다.[1] 그의 주요 업무는 의회 법안을 준비하여 국회에 제출하는 것이었다.[1]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에는 곡물관리부와 식량부에서 일했으며, 1915년 초에 창설된 제국 곡물청을 1916년 7월까지 지휘했다. 이 기구는 독일 전역의 곡물 및 밀가루 수집 및 배급을 담당했다. 그 후 아돌프 토르틸로비츠 폰 바토키-프리베 국무장관(즉, 장관)에 배속되어 전쟁 식량청(''Kriegsernährungsamt'')을 조직하는 것을 도왔다. 1916년 말, 쿠노는 재무부의 전쟁 관련 경제 문제 부서를 맡게 되었다.[1] 다시 재무부로 복귀해 전시 경제 담당 총 고문관으로 일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17년, 함부르크 아메리카 라인(HAPAG)의 총책임자인 알베르트 발린의 요청에 따라, 1917년 11월에 해운 회사에 이사로 합류하기 위해 공무원을 그만두었다.[1]
2. 3. 함부르크 아메리카 해운회사 (HAPAG)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쿠노는 독일의 식량 공급 조직에 참여했으며, 1916년 7월까지 제국 곡물청을 지휘했다. 이후 전쟁 식량청(''Kriegsernährungsamt'') 조직을 도왔고, 1916년 말에는 재무부의 전쟁 관련 경제 문제 부서를 맡았다.[1]함부르크 아메리카 라인(HAPAG)의 총책임자 알베르트 발린의 요청으로 1917년 11월 해운 회사에 이사로 합류했다. 발린이 독일 혁명에 절망하여 1918년 11월 자살한 후, 12월에 쿠노는 HAPAG의 총책임자로 승진했다.[1]
경제 전문가로서 쿠노는 전후 휴전, 배상금, 평화 조건에 대한 협상과 제노바 경제 및 금융 회의 등 국제 회의에 참여했다. 그는 독일이 라팔로 조약을 체결하여 소비에트 연방과의 관계를 정상화한 것에 항의하며 회의에서 물러났다.[1] 1921년과 1922년, 쿠노는 베르사유 조약 조건에 따라 연합국에 인도된 상선에 대한 보상과 관련하여 독일 해운 회사와 정부 간의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1][2]
1920년, 쿠노는 HAPAG을 유나이티드 아메리칸 라인과 동맹을 맺도록 이끌어 HAPAG가 여객선으로 재건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또한 해외 여행 중에 비공식적으로 독일의 외교 정책적 이익을 대표했다.[1] 1926년, HAPAG의 대표 이사로 복귀하였다.
2. 4. 독일 총리 (1922-1923)
1922년 11월 요제프 비르트 내각이 물러나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은 빌헬름 쿠노를 총리로 지명했다. 쿠노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국회의 승인을 받지 않고 대통령 권한으로 총리 직에 오른 첫 총리였다. 중앙당, 독일 인민당, 바이에른 인민당이 연립한 소수 여당의 경제 내각을 조성하였다. 내각의 다수 각료는 경제계에서 초빙되었으며, 전쟁 배상금 문제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미국과 좋은 관계를 이끌어낼 것으로 기대되었다.총리 직에 오른 직후인 1923년 1월, 프랑스군과 벨기에군에 의한 루르 점령이 발생하자, 쿠노는 소극적인 저항 정책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이미 망가진 경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결국 사회민주당이 불신임 가결안을 가결하면서 1923년 8월 총리 직에서 물러났다.
2. 4. 1. 루르 점령과 소극적 저항
1923년 1월, 빌헬름 쿠노가 총리 직에 오른 직후 밀린 배상금 지불을 목적으로 프랑스군과 벨기에군이 루르 점령을 단행했다. 이에 쿠노는 소극적인 저항 정책을 펼쳤으나, 이는 이미 악화된 독일 경제를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1]독일이 나무와 석탄(금화 부족으로 대신 지급하던 배상금) 선적을 불이행하자, 프랑스는 이를 합의 위반으로 간주하고 1923년 1월 11일 군대를 파견하여 루르를 점령했다(벨기에군도 추후 합류). 이 조치는 독일 외부에서도 불법으로 여겨졌으며, 분노한 쿠노 정부는 소극적 저항을 촉구했다. 프랑스와 벨기에로의 배상 선적은 중단되었고, 광산에는 해당 국가에 물품을 인도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졌으며, 공무원과 철도 직원들은 점령 당국의 명령에 불복종하도록 지시받았다.[1]
독일 산업의 핵심 지역인 루르 경제는 거의 마비되었다. 독일 정부는 루르 지역 사업체와 폐쇄, 추방, 체포 등으로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 재정 지원금을 지급했는데, 이 금액은 막대했으며 대부분 돈을 찍어내는 방식으로 충당되었다. 이로 인해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마르크화 가치는 폭락했다.[1]
1923년 5월과 6월, 독일 정부는 배상 문제 협상을 재개하려 했으나, 레몽 푸앵카레 프랑스 총리 겸 외무 장관은 소극적 저항이 먼저 끝나야만 협상에 응하겠다고 주장하여 무산되었다. 1923년 8월, 정부를 상대로 한 파업 물결이 일어났다. 결국 1923년 8월 12일, 쿠노와 내각은 사회민주당이 제기한 불신임 투표에 직면하여 사임했다.[1][4]
2. 5. 총리 퇴임 이후
쿠노는 정계에서 은퇴하여 함부르크 미국해운회사(HAPAG) 이사로 복귀했다. 1926년 다시 HAPAG의 사장이 되었다. 그는 전쟁 중 미국에 압류된 독일 재산 반환 협상에 참여했고, 1930년 Norddeutsche Lloyd 해운 회사와의 합병을 위해 노력했다.[1]1925년 독일 대통령 선거에서 쿠노는 중앙당 후보인 빌헬름 마르크스 대신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2]
1932년 쿠노는 실업가 빌헬름 케플러와 함께 아돌프 히틀러에게 경제 자문을 했다.[5][6]
1933년 1월 3일 함부르크 근처 아움뮐레에서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1]
참조
[1]
웹사이트
Cuno, Wilhelm
https://www.deutsche[...]
2024-06-15
[2]
웹사이트
Das Kabinett Cuno - Einleitung
https://www.bundesar[...]
2015-01-06
[3]
웹사이트
Das Kabinett Cuno (22. November 1922 – 12. August 1923)
https://www.bundesar[...]
2024-06-15
[4]
웹사이트
Wilhelm Cuno 1876-1933
https://www.dhm.de/l[...]
2024-06-15
[5]
서적
Die FDP in Hamburg 1945 bis 1953. Start als bürgerliche Linkspartei
Martin Meidenbauer Verlagsbuchhandlung
[6]
서적
Die FDP in Hamburg 1945 bis 1953. Start als bürgerliche Linkspartei
Martin Meidenbauer Verlagsbuchhandlung
[7]
웹사이트
Cuno, Wilhelm
https://www.deuts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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